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오 10세 (문단 편집) === 사치 행각 === 하지만 반대로 그의 사치가 겹쳐 교황청에 미증유의 재정 파탄이 일어난 점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레오 10세는 3대에 걸친 교황의 수입분을 혼자 처먹었다. [[율리오 2세]] 때 축적된 재산, 레오 10세 자신의 수입, 다음 교황 것까지 3인분!"'''이란 소리까지 나왔다. 재위기간과 더불어 그가 비교적 이른 40대의 나이에 사망했다는 것까지 감안하면 공식적인 기록보다도 사치가 더 심했을 수도 있다. 또한 [[미식가]]로도 유명했고, 한번 잔치를 열었다 하면 300명씩은 대동하여 사냥터까지 가서 말을 몰고 다니면서 호화로운 연회를 차릴 정도. 당대 이탈리아 최고의 명문가였던 메디치 집안의,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면 재벌 3세~4세로[*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를 창업자로 세면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파테르 파트리아이]]와 그의 아들(레오 10세의 할아버지)[[피에로 디 코시모 데 메디치|일 고토소]]가 2세대, 레오 10세의 아버지인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일 마니피코]]가 3세대이다. 레오 10세는 대략 재벌 4세...] 태어난 초부유층 출신이기 때문에 금전감각이 없었다. 하지만 사회로부터 소외받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훌륭한 자선가였고, 대체로 씀씀이가 커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아낌없이 퍼다주는 편이었다. 나쁘게 말하면 [[호구(유행어)|호구]] 중에 상 호구. [[교황청]]에 인사를 온 단순 참배객들에게도 고가의 은전을 펑펑 뿌려서, 재임 초기부터 교황청 재정은 이미 바닥을 드러냈다고 한다. 8년여간 재임기간 2,150여개 성직을 매매하여 300만 두카트를 벌었으나 고작 8년간 500만 두카트를 탕진하고, 사망시 교황청에 80만 두카트에 달하는 빚을 남겼다. 이 정도의 금액은 세속 왕국 하나를 여러 번 파산시킬 금액이었다. 1519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거 시에 유럽 최강대국 [[프랑수아 1세]]가 선거자금으로 30만 두카트, 카를 5세가 푸거 가문에 50만 두카트를 대출받아 85만 두카트를 지급하여 당선되었는데, 레오 10세 치세의 지출이 이 정도였으니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할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